불교역사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수,당시대의 불교 부흥기

관리자 | 2006.03.14 05:04 | 조회 4431
수,당시대의 불교 부흥기

수 왕조(589~618년)와 당 왕조(618~906년)의 치하에서 중국의 중세 문명은 절정에 이르렀다. 다시 한번 강력한 중앙정부가 그 위력을 중앙아시아까지 확장하였으며, 한국이나 베트남, 티베트 같은 주변 국가들에 대하여 자국의 종주권을 강요하였다. 수도인 장안(長安, 현재의 西安)은 재건되어 세계 제패의 상징이 되었다. 10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거대한 직사각형의 수도에는 거대한 궁전과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의 관료조직으로 구성된 중앙 행정기구가 들어섰다.

수와 당시대에는 사람의 수에 따라 토지를 할당하는 제도를 통해 농업경제가 통제되었으며, 이러한 농업경제가 대장원을 소유한 귀족 지식층에 의해 여전히 지배되는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체제에서 불교는 이전보다 더 큰 번영을 누렸다. 대부분의 황제들은 불교교단을 후원하였는데, 때로는 정치적인 이유가 고려되기도 했다.

수나라의 개창자는 의식적으로 불교의 전통에서 성왕(聖王)이라고 추앙되는 전륜왕(轉輪王)인 양 행세하였다. 측천무후(則天武后, 623~705년)는 능력은 있었으나 무자비한 전제 군주로서 15년 동안(690~705년) 중국을 통치하였는데, 무후는 자신이 미륵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면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불교를 이용하였다.

그 뒤를 이은 통치자들은 국가와 왕조의 안녕을 위해 의식을 집전하도록 설립된 국가사찰이라는 제도를 운용하였고, 일부 통치자들은 많은 귀족들이 그랬듯이 유명한 승려들과 밀접한 유대를 맺었다. 그러나 북위(北魏)의 치하에서처럼 후원은 항상 교단을 관료의 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와 결부되어 있었다. 당나라시대에는 속인 관리들까지도 이를 실행하였다. 그래서 사원의 규모를 억제하고 승려직의 시험제도를 두어 그 순수성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중국인의 통제 아래 들어간 중앙아시아는, 7세기 후반까지 중국과 인도 사이에서 그 매개 지역으로서의 기능을 계속 발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나라시대의 초기에는 인도 순례자가 급증하였다.

그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현장(玄斡, 596~664년경)이다. 그가 중국불교의 독보적인 인물이 된 것은 그의 엄청난 여행 경력(629~645년)과 뛰어난 관찰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위대한 학자이자 번역가였으며, 일찍이 산스크리트어에 정통한 예가 없었던 중국에서 산스크리트어에 정통했던 극히 드문 중국인이었기 때문이다. 현장의 번역팀이 이룩한 작품들은 이 분야에 있어서 중국인의 활동으로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최고를 기록한다.

7세기 후반에 아랍의 정복자들이 인도로 통하는 육로를 차단하자 순례자들은 점점 중국의 남부 해안에서 현재의 캘커타 근처에 있는 탐랄립티(Ta-mralipti)와 스리랑카로 통하는 해상 통로를 택하였다.

불교는 그 시대의 종교적이고 지적인 생활에 있어서 보다 창조적인 운동으로 나아갔다. 6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 번창했던 일부 학파와 종파들은 인도의 입김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현장은 인도의 유식학을 받아들여 중국에 학파를 설립하였고, 이보다 약간 후대에는 인도의 승려들에 의해 비교(秘敎)적인 밀교의 다양한 유형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다른 학파들은 근본적으로 중국적이었다. 중국으로 이식되었든지, 아니면 중국에서 발전하였든지, 이들 모두는 무수한 주석서들을 저술하였다. 그 중 일부는 번역된 경전에 의거하였고, 또 일부는 위대한 독창성을 지닌 독립된 이론들로 이루어졌다.

정토종(淨土宗)과 같은 일부 종파들은 해탈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아미타의 자비에 의탁하는 헌신적이고 전파력이 강한 신앙형태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다른 종파들은 ‘교의의 분류’인 판석(判釋)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판석이란 하나의 특별한 경전이 최상의 진리를 담고 있고, 다른 경전들은 모두 계시의 연속적인 준비단계에 속하며, 그 각각은 가르치는 방법을 달리하여 각기 다른 청중에게 설해지고 있다는 개념이다.

그에 따라서 천태종은 교설의 구조가 다섯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법화경의 일승(一乘)이라는 교의로 귀결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천태종에 못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한 화엄종에서는 그 귀착점을 화엄경(華嚴經)으로 삼았다.

대승적인 관념과 실천이 중국에서 가장 발전한 것이 선종(禪宗)이다. 선종은 7세기경 중국에서 형성되었다.

본래 선(禪)의 발생지는 인도이다. 선은 불교수행의 중요한 수행법의 하나이지만 불교 발생 이전부터 인도에 있었다. 인도는 환경적인 요인때문에 고대부터 명상법이 발달하였다. 한낮의 지독한 더위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숲 속의 나무 그늘에 앉아 명상을 하게 되었다. 명상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자 이들은 명상을 통해 우주와 인생의 근본 문제까지도 사색하게 되었다.

고타마 붓다도 당시 다양한 수행법을 다 경험해 보았지만, 그것으로는 생사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 마침내 정각을 깨친 것이다.

중국에서 선의 기원은 남북조시대에 보리 달마(Bodhidharma, 6세기 초 생존)가 인도에서 동쪽으로 와서 선을 전래한 것이다. 달마는 인도의 남천축국 향지왕의 왕자로, 출가하여 부처님 법을 이어 27대조가 되었는데 ‘중국에 가서 크게 법을 펴도록 하라’는 스승의 지시로 중국으로 왔다.

당시 인도의 고승이 중국으로 왔다는 소식을 들은 양나라 무제는 궁으로 달마를 초빙하여 문답을 나누었다.

무제가 달마에게 물었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 수많은 절을 짓고 스님이 되고자 원하는 이들을 도왔으며, 경전을 간행하거나 복사하는 일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하였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무 공덕이 없습니다.”
“어찌 아무 공덕이 없습니까?”
“그러한 일들은 모두가 다만 중생세계에서의 조금 나은 결과를 얻어서, 생사에 윤회하는 원인이 될 뿐입니다. 마치 모양을 따르는 그림자가 비록 있기는 하나 실체가 아닌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입니까?”
“청정하고 원만하게 밝은 지혜를 얻는 공덕이 참된 것이나, 이것은 세속의 공덕으로는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제가 다시 물었다.
“불법의 가장 거룩한 근본 의의는 무엇입니까?”
“근본 자체가 공적(空寂)하여 거룩한 것까지도 없습니다.”
“그러면 나를 대면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모릅니다.”
양 무제는 그 뜻을 깨닫지 못했다.

달마는 선의 오묘한 뜻을 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판단하고 북쪽 낙양의 숭산 소림굴로 들어가 9년 동안 면벽 수도하며 때를 기다렸다. 이 무렵 선종 2조가 되는 혜가가 소림굴을 찾아 문답하던 중 깨치고 법을 이어 받았다.

이어서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으로 이어진 부처님의 교외별전 법은 당나라시대 6조 조계 혜능(曹溪慧能, 638~713년) 대에 이르러 선종이라는 독자적인 종파의 위상을 갖추게 된다.

5조 홍인에게는 신수와 혜능이라는 걸출한 제자가 있었는데 신수는 장안, 낙양을 비롯한 북방을 중심으로, 혜능은 호남, 강서 등 남방을 중심으로 법을 펼쳐 각각 북종ㆍ남종으로 불리며 중국 전역에 확산되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남종선은 후대에 북종선을 흡수하여 중국 조사선의 정통성을 확립하게 되는데, 북종의 점오(漸悟)가 선의 본질을 훼손시켰다는 점과 정치적 후원 세력이었던 측천무후의 몰락 등이 그 배경이었다.
보덕사 석등 법주사 쌍사자 석등   실상사 석등 용암리 석등

이에 반하여 남종은 돈오(頓悟)사상을 제창하여 선의 정통성을 확립하였고, 사회ㆍ정치적으로도 측천무후 이후 현종대의 개혁파 관료들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6조 조계 혜능의 문하에는 남악 회향과 청원 행사, 하택 신회, 영가 현각, 남양 혜충 등 걸출한 선지식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남악은 문하에 마조 도일이라는 대선지식이 나와 강서를 중심으로 법을 폈고, 또한 청원 문하에 석두 희천은 호남지방에 선풍을 드날리었는데, 강서의 마조와 호남의 석두가 조사선 또는 중국 남종선의 융성기를 열었다. 여기에서 ‘강호(江湖)’라는 말이 유래되어 천하의 선지식들이 법을 각축하는 것을 일컫게 되었다.

달마가 전파한 선은 6조 조계 혜능대에 이르러 한 종파로 위상을 확립하였고, 마조대에 이르러 선종이 중국의 중심사상으로 뿌리 내리게 되었다. 마조는 성품이 인자하며 소걸음에 호랑이 눈길이었다고 하는데, 마조 문하에는 139명의 대선지식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88명이 천하에 흩어져 조계 혜능의 조사선을 천하에 전파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조는 ‘천하에 선을 유포시킨 제일 공로자’로 평가된다. 특히 한국에 남종선을 최초로 전하여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로 추앙된 도의선사도 마조의 제자인 서당 지장선사의 법을 이었다. 또한 고려 중엽에 태고 보우는 중국 선종의 여러 법맥 중에서 조계 혜능 - 마조 도일 - 임제 의현으로 이어진 임제 법맥을 이어 임제 선풍이 한국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마조 문하에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백장 회해가 선종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선이 천하에 널리 알려진 당시까지도 선종은 가람을 따로 정하지 않고 대개 율종 사찰에서 더부살이로 지냈으며 특별한 규율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백장은 백장산에 살면서 대중들이 많아지자 질서를 잡기 위해 경ㆍ율을 참조하여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만들고 총림(叢林)이라 하게 되니, 이것이 선종 최초의 법규와 도량이 되었다. 백장은 선종의 청규를 만들고 몸소 모범을 세웠는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라는 유명한 교훈을 남겼다.

이와 같이 중국 선종은 당나라시대에 황금기를 구가하였는데 육조 혜능을 정점으로 선승들이 선사상과 법맥, 지리적 요인을 계기로 위앙종ㆍ임제종ㆍ조동종ㆍ운문종ㆍ법안종으로 이름 지은 선종 5가를 이루었다.

이처럼 중국에서 인도와 달리 선이 꽃 피우게 된 데에는 달마 이후 역대 조사에 의하여 수도와 전법이 끊이지 않았고 북방에 맞는 토양과 풍토에서 새로운 법규를 세워 나갔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꽃피운 선을 특별히 ‘달마선’ 또는 ‘조사선(祖師禪)’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부처님 선과 다른 것이 아니며, 단지 북방 선종에 대한 강조의 뜻이 담겨 있다.

선종에서 말하는 바는 부처님이 깨친 법, 즉 중도연기(中道緣起)는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바, 누구나 스스로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마음으로 깨치면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부처님과 가섭 사이에 전해지는 ‘염화시중의 미소’가 바로 부처님이 이심전심, 불립문자, 교외별전으로 전한 선의 시원이라 한다. 그러므로 선종에서는 경전이나 이론과 말로 하는 것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비유한다. 팔만대장경조차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므로 팔만대장경의 진리를 자기 마음에서 깨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부처님 교법과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신심, 발심이 된 사람이라면 경전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깨칠 수가 있고, 오히려 마음을 깨치는 수행에는 문자로 된 어떤 것도 알음알이를 조장함으로 걸림이 된다는 것이다.

당ㆍ송시대에는 선종이 융성하면서 교종은 위축되었는데, 이 무렵 선종은 최고의 융성기가 되어 중국의 중심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선종의 선지식들은 부처님과 같이 제자와의 문답을 통해 가르침을 폈는데 이것이 ‘간화선(看話禪)’이라는 수행법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와 선지식이 부처님 법에 대하여 문답하는 중 선지식이 깨치라고 한 말을 수행자가 깨치지 못하고 의심하게 되어 이것이 ‘화두(話頭)’로 발전한 것이다. 원오 극근, 대혜 종고가 간화선을 정립하였다. 당ㆍ송시대에 융성한 선종은 이후 한국, 일본에도 전파되어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인들은 전형적으로 가계(家系)의 내력을 분명히 하기를 좋아했으므로, 이에 따라 몇몇 종파들에서는 나중에 그들의 초기 역사를 조사(祖師)들의 계보로서 재정리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선종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그래서 중국에 있어서의 정신적 혈통을 전설이 가미된 달마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추적하고, 나아가서는 고타마 붓다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선종 자체 내에 수많은 종파들과 그에 부수되는 종파들이 생성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당나라시대에는 승단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몇몇 공식적인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729년에 모든 승려들을 각 현(縣)의 단위로 등록케 하였다. 이에 의하면 승려는 126,100여 명, 사원은 5,385여 곳으로 집계되었다. 그런데 불교에 대한 큰 박해가 있을 당시(842~845년)의 공식 문서에서는 4,600여 곳의 사원과 40,000여 곳 이상의 작은 사찰 및 암자가 있었다고 하며, 그 당시 강압에 의해 환속한 비구와 비구니가 260,5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아마도 구족계를 받은 비구와 비구니들만을 언급한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므로 종종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교단에 입문한 수많은 ‘대중 속의 승려’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기록된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당시에는 간혹 수계증을 사서 교단에 입문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당나라시대에 교단은 사회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승려와 속인이 혼연일체가 된 교단은 헌신과 선행, 현실적인 협동으로 번창하였다.

대승의 관념인 자비는 구체적이고, 현세적인 행위를 선호하는 중국인의 전통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고, 사원과 세속사회가 주창한 공공복지 활동의 전 분야를 고무시켰다. 그리하여 병원과 진료소를 지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기근이 닥칠 때는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승려들이 도로, 다리, 우물, 목욕탕 등의 공공시설을 건립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불교의 경축일이나 행사는 대중적인 민속의 일부가 되었고, 사찰을 위한 장이 개설되었다. 본래 이 장은 향(香)이나 불상(佛像)과 같은 종교적인 물품만을 거래하도록 한정되어 있었는데 정기적인 시장으로 발전하여, 엄격하게 규제되고 정부가 관리하였던 당나라 초기의 시장체계를 와해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문화의 분야에서 불교가 중국문화, 그리고 실제로 세계의 문화에 끼친 물질적 공헌은 보다 지대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쇄술의 발명이었다. 그것은 불교권에서 불화나 부적 같은 것을 값싸고 효과적으로 재생하는 방법으로 개발하여 급기야는 완전한 경전을 재생하게 되었다. 이 기술은 8세기 혹은 그 이전에 처음으로 개발되었다.

현존하는 인쇄본으로서 가장 오래된 868년의 『금강경(金剛經)』은 인쇄술의 완성된 기술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개발된 결과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972년에는 황제의 명령으로 불교의 문헌 전체가 인쇄되었다. 그 무렵 이 인쇄술은 일상적인 목적으로도 이용되기 시작했다.

사회에 대해 이처럼 위대하고 긍정적인 불교교단의 역할은 사실상 쉽게 경제활동과 분리될 수는 없었다. 대사원의 부는 항상 증진되고 있었다. 그 부는 기본적으로 토지라는 부동산과 사찰의 경작지에 딸린 소작인의 인력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 중의 일부는 정부가 할당하거나 기부한 것으로서 합법적으로 확보되었다. 그러나 사원의 부는 다소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즉 부유한 지주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순전히 형식적인 복전(福田)을 기부함으로써 수익이 생겼고, 당나라 초기의 법규에 따라 원칙적으로는 토지의 거래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토지를 매입하여 사원의 장원으로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부를 증대했다.

대사원은 소위 ‘무진장(無盡藏)’이라는 형태로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 무진장이란 일종의 집합적으로 소유된 자본인데, 이는 대부나 전당포업과 같은 세속적인 목적에 이용되었고, 뿐만 아니라 물레방앗간이나 기름 압착업을 개발하는 등의 다양한 종류의 상업체를 운영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특히 전당포업과 관련하여, 사원은 중국의 금융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동과 귀금속을 종교적인 조상(彫像)이나 의식의 집전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매점(買占)한 것이었다. 결국 715년, 정부는 모든 동상과 청동상을 몰수하고 현금으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8세기 중엽, 당나라는 민란 등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국가는 곤궁에 시달렸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국고를 채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9세기경 정부와 불교교단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후기로 접어든 당나라는 지적인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중국 전통의 근본을 회복하자는 경향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이는 관직에 등용하는 가장 신빙성 있는 방법으로써 유교적 시험제도가 강화되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불교의 근원이 이방국이라는 낡은 논쟁이 재연되었다.

무종(武宗, 841~847년 재위)의 치하에서 결국 문제가 발생했다. 이 때 취한 조치의 성격을 살펴보면 그 주요 동기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그 조치는 불교사원의 힘을 분쇄하고 그 부를 몰수하려는 급진적인 시도였다. 박해는 통제적이고 억압적인 조치들이 지속적으로 취해졌는데, 842년에 시작되어 이후 3년 동안 극에 달했다. 이것이 불교의 문헌에서는 ‘제3 법난’이라고 알려져 있다.

845년에는 불교의 모든 설비를 파괴하고, 모든 승려를 환속시키며, 약 150,000여 명으로 추정되는 사찰에 딸린 모든 노비들을 해방하고, 사찰의 모든 토지와 교단의 다른 유형재산도 몰수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적어도 중부지방에서는 이 칙령이 엄격히 집행되었다.

842년에서 845년까지의 억압은 조직화된 승단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재가 신도로부터는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어느 시대에도 불교가 그처럼 금지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종의 계승자는 반불교의 칙령을 폐지하였고, 교단은 다시 기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박해로 교단은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었다.

물질적 파괴의 결과와는 별도로 9세기 후반 이후 불교의 일반적 쇠퇴는 보다 근본적인 다른 원인도 지니고 있었다. 그 원인들은 그 당시 힘을 얻기 시작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라는 거대한 흐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한 흐름들이 중세 중국사회의 구조와 제도를 점진적으로 변형시켰다. 그러한 변화 이전에 극도로 번창했던 당시 불교교단은 중국사회의 새로운 변화에 당연히 영향을 받았다.

수와 당의 치하에서 발전했던 불교는 너무 강대했으므로, 황제의 법령에 의해 일격으로 분쇄될 수는 없었고 점진적인 쇠퇴가 진행되었다. 힘이 다하여 서서히 그 지적 활력과 창조력, 그리고 그 사회적 지위를 상실하여 갔다. 교육을 받은 지식층은 점점 불교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우수한 인재들은 사원보다는 과거시험을 통한 세속적 출세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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